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건축에 관한 에세이다. 건축이라는 단어가 자칫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큰 무리없이 읽을 수 있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건축 용어들도 설명이 잘 되어 있고 일단 글 자체가 어렵지 않다.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를 겸하고 있다고 들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해서 그런지 책 역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작업하신 듯 하다.
책을 읽다보면 신선한 충격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만큼 작가가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흥미롭다. 대표적인 예로 1장에서 작가는 걷고 싶은 거리를 정의내리는 데 '이벤트 밀도'라는 정량적인 기준을 사용한다. 이벤트 밀도란 단위거리당 출입구의 수로, 수치가 높을 수록 해당 거리는 보행자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보행자로 하여금 어느 곳을 지나치고 어느 곳에 들릴 것인지와 같은 선택권을 제공함으로써 삶의 주도권을 높여주기도 한다. 당연히 이벤트 밀도가 높을 수록 그 공간은 걷고 싶은 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들을 단번에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끔 만든다. 단순히 건축이라는 카테고리에 국한되지 않고 공간이 주는 영향력을 인문학의 다양한 영역과 연결지어 바라보는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인달까. 그 중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작가는 아파트의 복도가 주택들 사이를 가로지르던 골목길을 대체하면서 세대간의 교류를 단절시켰다고 얘기한다. 나 역시 이 구절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다만 나 같은 경우에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계단식 아파트로 이사하며 위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5년 남짓을 살았던 편복도 아파트는 층마다 네 세대가 들어서 있었는데, 어머니들이 복도에 나와 저마다 이불을 널어놓거나 고추를 말리며 수다를 떠는 동안 옆집 아이들과 그 좁은 복도를 뛰어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몇 년 후 이사간 계단식 아파트 역시 두 세대를 아우르는 복도가 존재했지만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는 콘크리트 바닥이었을 뿐 앞집과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탁 트인 공간은 아니었지만 나름 기분 좋은 햇빛이 들어오던 복도가 나에겐 작가가 말하는 골목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는 어떻게하면 '좋은 건축'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텐데 말이다. 거실을 향해 창문을 내어 구성원 간의 소통을 꾀하고, 광화문 광장 양쪽에 노점들을 설치해서 걷기 좋은 거리를 조성하고.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건축이라는 본인의 탐구 대상을 향한 일종의 애정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교수나 작가가 아닌 건축가로서의 작품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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