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집이다. 총 9편의 작품으로 길이가 짧아서 출퇴근길에 하나씩 읽기 좋았다. 글의 모양새가 간략하고 묘하게 리듬감이 있는데 〈계속해보겠습니다〉 때보다는 술술 읽혔다. 다만 워낙 함축적이라고 해야 하나, 내공이 적은 내가 마음으로 이해하고 감상을 남기기에는 어려운 작품들이 몇 있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단편들은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아래에 그 단상을 기록해본다.
1. 「대니 드비토」
유라는 어느 순간 갑자기 본인이 죽었음을 깨닫고 생전의 연인이었던 유도 씨에게 말 그대로 붙어 버린다. 예전에 유도 씨가 했던 말처럼 정수리에도 붙었다가 오른쪽 팔에도 붙었다가 발등에도 붙었다가 종국에는 유도 씨의 집에 붙어서, 기다린다. 언젠가 나처럼 죽어 원령이 될 유도 씨와 함께 사라질 수 있기를 바라며. 유도 씨가 새로운 연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쇠약해져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유라는 기다린다. 가끔은 뭘 기다리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기다린다.
대니 드비토. 죽은 유라가 어느 순간 무심코 궁금해하던 배우의 이름이다. 다소 뜬금없기도 한 이 이름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토록 긴 시간을 버티다 사라지는 순간에 말이다. '나도 저렇게 될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복자처럼 근사하게 사라지지 못하고 나도 유라처럼 죽어 원령이 된다면,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붙어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가 사라지게 되는 걸까? 어느 순간에는 기다림의 목적도 잊은 채, 내가 무엇이었는지도 잊은 채 말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공들여 겨우 희미해지고 말 거라면 유도 씨의 말처럼 죽음 그 자체로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유라가 겪은 쓸쓸함에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유도 씨는 덧없이 사라졌을까. 어쩌면 본인을 기다리고 있었을 유라를 생각하며 신선한 원령으로 남았을지도.
2. 「묘씨생」
소설의 화자는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고양이다. 그것도 벌써 다섯 번 죽고 다섯 번을 살아난 고양이. 우리네 인간의 삶을 인생이라고 하듯이, 고양이의 삶이라서 묘씨생인 걸까. 아무튼. 이야기를 읽고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온 고양이들을 떠올려보았다. 친구가 애지중지 키우던 고양이. 언젠가 술에 쉬해 참치캔을 사다가 나누어주었던 고양이. 집 모퉁이에 있는 회색 담벼락 위에 웅크려 앉아 있던 고양이. 비단 고양이뿐만이 아니라 가끔은 귀엽다고 사진을 찍고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던 것들. 그것들에게도 '생'이라는 게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곡씨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노인이다. 다 비틀어진 골방에 손에 꼽히는 살림살이 몇 개를 두고 다른 이들이 버린 음식을 반찬 삼아 먹고 사는 인간. 고양이는 종종 인간에 대한 분노를 표한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들이다. 체온을 나눠가진 뒤로 곡씨와 고양이는 묘한 공생에 들어간다. 둘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실 별다를 게 없다. 그저 먹고 사는 것. 다 같은 몸이고 보니 외로우면 울고 배고프면 먹는 것. 그게 다인 삶들에 경중이 어디 있겠는가. 그 일생들에 잣대를 들이대며 이것은 특별하고 이것은 필요없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럼에도 곡씨와 고양이의 일생은 퍽 힘들다. 여기가 절벽 끝인가 싶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어디론가 또 밀려나는 삶이다. 노인은 그렇게 창 하나 없는 작은 방으로, 고양이는 폐허만이 가득한 쓰레기장으로 밀려난다. 목숨조차도 내 것 같지 않다는 말에는 출퇴근 지하철 안이었는데도 눈물이 찔끔나서 혼났다.
그 밖에 인상적이었던 소설은 「뼈 도둑」. 뼈를 한 조각만, 나누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조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지.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불편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으면서 내내 마음 속에 품고 있었을 그 말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 쓸쓸함. 사실 짧은 소설집이었지만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왠지 후루룩 읽어내릴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책도 있구나 싶었고. 워낙 책을 놓고 산 시간이 길어서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인지 느끼는 바가 그다지 격동적이진 못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문장이 참 많았던 책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처럼 사는 동안 가끔 다시 떠올리게 될 것 같은 문장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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