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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 책

1. 계속해보겠습니다(황정은, 창비)

by 8월 2021. 4. 14.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 몇 달은 직장과 집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져서 도무지 뭘 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정도 숨이 트이고 나니 내 하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상.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일단 최대한 얇은 책을 고르자는 생각 하나로 서가를 돌아보다가 예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구절 하나를 떠올렸다. 어느 소설책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했었다. 검색하니 금방 책 제목이 나왔다. 제목은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설명하자면 저러한 연유로 읽게 된 책이었다. 책은 정말 얇아서 출퇴근길에 읽기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그 출근길이라는 것이 뭘 하든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시간이라 첫 장을 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지만.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 묘한 라임이 느껴지는 소설의 첫 줄이다. 문체가 독특하다고는 들어 알고 있었다. 잦은 줄 바꿈과 간결한 문장들에서 확실히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묘한 거부감이 들기도 했는데 또 읽다 보니 금방 적응이 되었다.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 되새김질할수록 너무나 귀여운 문장이다.

그렇게 '미나리 라'자를 쓰는 소라의 장이 첫 번째. 그다음은 나나, 나기의 장이 순서대로 이어진다. 각자의 목소리를 빌려 전개되다 보니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나 어떤 상황들이 이렇게도 그려졌다가 저렇게도 그려졌다가 하는 식이다. 자매인 소라와 나나의 장은 확실히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둘의 어머니인 애자, 나나의 임신 등 큰 줄기가 되는 소재가 존재하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자매애가 한 층 더 성장하기도 한다. 나기 역시 둘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지만 나기는 또 나기만의 삶이 있어서 뭔가 외전 격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소설은 세상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한편, 끝에 가서는 나름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비 오고 난 뒤 나는 땅 냄새 같달까. 이 답 없는 인생의 과거가 어떠하였든, 또 앞으로 어찌 되든, 소라와 나나와 나기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계속해보겠다는.

인상적인 부분이 몇 있었다. 일단 소라, 나나, 나기에 순자씨까지 합쳐 넷이 만두를 만드는 장면. "오래기다리셨습니다."와 함께 시작되는 그 소소하고도 따듯한 연례행사의 소개가 너무 좋았다. 각자 나름의 삶을 살다가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하면서 한 집에 모여 만두를 만든다니. 나도 거기 함께 껴서 아무 생각 없이 만두나 만들었으면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걱정과 고뇌에 시달릴 시간이 어디 있겠나. 엄청난 양의 만두피와 소를 합체시키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텐데.

또 하나는 애자의 존재를 불현듯 지워버리는 소라의 모습. 나나의 병간호를 하던 순간이었나. 그리고 그런 소라를 익숙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애자의 모습. 사실 책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인물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나나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으로는 공감이 안 되는. 그래서일까 나나는 그런 애자와 소라를 보며 기괴하다고 했지만 난 그다지 기괴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나기의 장. 인터넷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은 나기의 장에 있었다.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너여야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해야지." 책을 읽으면서는 저 구절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가 막상 그 글자들을 보자 아 맞다, 했다. 별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너"를 잃어버렸다고 독백하는 장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그전까지는 감정의 높낮이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던 나기였지만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지쳐버린 뒷모습이 보였다. 소라와 나나, 순자 씨가 잠들어 있는 새벽녘. 그 고요한 가운데 홀로 깨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모르는 "너"를 찾아 유영하는 나기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속이 먹먹했다.




누군가가 이소라의 'Track 9'과 함께 읽고 싶은 소설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다.

더 무료해졌으면 무료해졌지 다이나믹 할 일 없는 내 인생도 계속해봐야지 어쩌겠나. 불행과 고독과 우울이 아예 없는 삶을 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바람 불면 흔들릴 수도 있지. 하지만 그 흔들림 뒤에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게 내 안의 묵직한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 소라와 나나와 나기도 그렇게 잘 지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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