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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 책

5. 대불호텔의 유령(강화길, 문학동네)

by 8월 2022. 6. 26.

여름이 가까워지니 오싹한 이야기를 읽어줘야 하지 않겠나! 무슨 책을 빌리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예전에 선물 받은 책 속에 끼워져 있던 보라색 홍보지가 번뜩 생각났다. 제목은 <대불호텔의 유령>. 장르는 고딕 호러란다. 제목도 그렇고 장르도 그렇고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책인데 무엇보다도 쨍한 보라색 표지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책 속의 화자는 작가이다. 어릴 적 겪었던 기이한 체험을 계기로 소설을 쓰려는데, 어쩐지 한 글자도 써내려갈 수가 없다. 자꾸만 들려오는 원한 가득한 환청과 머릿속에서 뒤섞이는 기억들. 어떻게든 글을 써내려가려던 작가는 친구 '진'으로부터 인천에 위치한 '대불호텔'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왠지 모를 이끌림에 직접 그곳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지금은 모든 게 사라지고 황량한 들판 뿐인 호텔의 빈터. 혹시나 영감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진 않을까 주변을 거닐던 작가는 녹색 재킷을 입은 여자를 마주치지만 여자는 유령처럼 금세 사라져버리고 만다. 혼란스러워하던 작가는 진의 외할머니가 종종 들려주곤 하는 옛 이야기 속에 녹색 재킷을 입은 여자가 등장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과연 작가가 목격한 녹색 재킷 차림의 여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왜 대불호텔의 빈터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

 

여기까지가 작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초반부이고, 이후로는 진의 외할머니가 해주는 대불호텔의 옛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쟁 이후의 1950년대 대불호텔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기거하며 숙박업과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내부 이야기의 화자는 '지영현'으로, 묘한 분위기의 여인 '고연주'를 도와 대불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다. 왜인지 고연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지영현의 유일한 바람은 이대로 연주와 함께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 하지만 새롭게 호텔을 찾은 미국인 투숙객 '셜리 잭슨'의 등장으로 영현의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점점 비뚤어지는 영현의 마음은 호텔이 지닌 원한을 닮아간다.

 

위의 외부 이야기와 내부 이야기 말고도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진의 어머니인 '보애'가 해주는 옛 대불호텔의 이야기는 진의 외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와는 또 다른 내용을 담고 있고, 작가의 엄마이자 보애의 친구인 '영소'가 어릴 적 겪었던 옹주와 관련된 이야기는 주인공이 어릴 적 겪었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각각의 이야기에는 언뜻 '원한'이라는 공통 분모가 존재하는 듯 보인다. 억울하고, 분통하고, 그래서 죽어서도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는 마음. 소설의 초반, 환청에 시달리던 작가는 본인 역시 악에 받쳐 소설을 써주겠노라고 다짐한다. 기이한 것들로부터 홀로 떨어져 있던 영현은 어느새 호텔이 품은 원한 그 자체가 되어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내몬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서 작가는 나름의 해결법을 찾는 듯 보인다. 여러 이야기들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소설은 마침표를 찍는다. 이 나름의 해결법이라는 것이 내가 기대하던 결말은 아니어서 김이 새는 느낌이었지만.. 분명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호텔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야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시대와 장소가 주는 분위기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연주를 향한 영현의 적나라한 심리 묘사가 쫄깃했다. 연주, 영현, 셜리, 뢰이한 넷이서 기다란 식탁에 모여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장면은 마치 그림으로 본 듯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불안과 공포 속 잠시나마 평온을 선사하던 순간. 

 

여담으로 대불호텔은 실제로 존재했던 곳이라고 한다. 철거되고 남은 빈 터 위에 생활사전시관을 세워 운영하고 있는 듯하다. 차이나타운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들르고 싶다. 녹색 재킷을 입은 유령을 만난다면 위로의 안녕을 건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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