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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 책

7. 저주토끼(정보라, 아작)

by 8월 2023. 4. 30.

부커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라 하여 도서관에서 좀 빌려보려 했더니만 항상 대출중이었던 《저주토끼》. 그렇게 몇 번 허탕을 친 뒤 잊고 지내다가 해가 넘어가고 나서야 읽게 되었다. 동명의 단편 〈저주 토끼〉를 필두로 한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이고,  총 10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전반적으로 쓸쓸하고 메마른 분위기의 글이기도 하고, 몇몇 단편은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곱씹어 보느라 한 번에 뚝딱 읽진 못하고 여러 번 나누어 읽었다. 

 

저주토끼

 

1. 〈저주 토끼〉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아주 강렬한 첫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저주 용품인 토끼 모양의 전등은 아주 귀여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얀 몸에 귀와 꼬리 끝을 검게 물들인 토끼는 금방이라도 귀를 쫑긋거리고 입을 오물거릴 것만 같다. 경쟁사 사장의 손자는 회사 창고에 처박혀 있는 토끼 전등을 발견하고는 단박에 제 엄마에게 달려가 갖고 싶다고 졸라댄다. 그렇게 저주는 손자에게로 옮겨간다. 회사의 종이를 갉아먹던 토끼는 손자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끔찍하고 잔혹한 저주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기를, 몇 날 며칠을 바라고 또 바라며 만들어냈을 물건은 누구라도 손을 갖다대고 싶을만큼 아름답다. 목적이 어찌되었건 간절한 마음이 담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불순한 의도를 조금이라도 숨겨보려는 재주일까. 소설의 끝에 가면 저주에 가담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뒤틀린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저 사람에 앞길에 약간의 불운이 존재하기를. 세상은 불공평하고 억울한 마음은 달리 갈 곳이 없으므로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것. 영원히 어둠 속에 홀로 남게 된다해도, 그걸 감수하고라도 품겠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 〈차가운 손가락〉

 

읽으면서 마치 서스펜스가 압권인 단편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비현실적인 묘사들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절로 장면들이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가느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마도 이야기 속 최 선생이겠지 싶다. 사랑하는 이에게 선택받지 못한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다가 이 선생과 자기 자신마저 끔찍한 굴레로 끌어들이게 되는. 잃을 것 없는 이의 원한이란 참 무서운 것 같다. 

 

 

3.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내 이마에 입 맞추었다.
그의 표정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애틋함과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셋 모두의 얼굴에 똑같은 애틋함과 슬픔의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실감하기 시작했다. 칼에 찔린 순간에도,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을 때도 이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들은 내가 이제까지 알던, 아니 안다고 생각했던, 인간을 닮은 기계가 아니었다.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빨리 발달하는 것 같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는 느낌이다. 근미래에는 정말 인공 반려자 같은 로봇이 대중화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아이돌이나 하물며 애니메이션 속 가상의 캐릭터와도 사랑에 빠지는 마당에, 나와 눈을 맞추고 생활을 함께 하는 로봇과 사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 만약, 내 세대 안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과연 의심 한 톨 없이 로봇과 사랑할 수 있을까? 언제고 내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애써 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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