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B: 책

3. 돌이킬 수 있는(문목하, 아작)

8월 2021. 5. 31. 15:09

기발하고 독특한 소재의 소설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우연히 왓챠에서 본 감상평을 타고 책 소개란까지 들어갔는데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갑자기 도시 한복판에 생겨난 싱크홀과 그 안에서 원인불명의 초능력을 얻어 돌아온 자들, 그리고 그들을 말살하려는 부패한 공권력과 비밀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각 집단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까지. 사실 아래 이미지의 표지와 달리 소설 속 배경은 꽤 어둡다. 다만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연대와 공감, 그리고 누군가의 순애보를 떠올려보자면 제법 어울리는 표지 같기도 하다.

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12년 전, 갑자기 생겨난 싱크홀이 산 하나와 수만 명의 사람을 삼켜버린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표면적인 수사는 종결되고 폐허가 된 유령도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간다. 한편, 경찰청 신입 수사관 윤서리는 동료인 서형우 팀장으로부터 한 범죄조직을 감시하라는 은밀한 임무를 맡게 된다. 조직의 이름은 바로 ‘비원’. 싱크홀에서 살아 돌아온 초능력자들로, 바깥세상과의 완벽한 단절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을 꾀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윤서리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서형우의 신뢰를 잃게 되고 그 대가로 누군가의 암살 작전에 투입된다. 작전지는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유령도시.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서 윤서리는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온 또 하나의 초능력자 무리 ‘경선산성’을 마주하게 된다. 암살 대상은 그들의 수장인 정여준. 서형우는 그를 가리켜 죽여 마땅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막상 대면한 남자는 어딘가 지쳐 보일 뿐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겠노라 말하는 사람을 과연 정말로 죽여야 할까? 비원, 경선산성, 그리고 그들 모두를 제거하고자 하는 싱크섹션까지. 윤서리는 도저히 한 데 섞일 수 없는 세 집단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모종의 비밀을 파헤침과 동시에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실 판타지적인 요소를 기대하고 골라든 책이었는데 예상외의 포인트들이 많아서 즐거웠다. 집단 간의 알력 다툼, 주어진 임무와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 스케일부터 다른 초능력자들의 액션까지. 살짝 지루한 초반을 지나 이 모든 게 휘몰아치는 중반부를 넘어서면 자연스레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여러가지 강점을 지닌 소설이지만 그 중에서 굳이 하나를 꼽아 보자면 아무래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저마다의 목적으로 똘똘 뭉쳐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세 집단과 달리 각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제법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일례로 무자비한 패악질을 일삼던 비원의 리더 최주상이 누군가의 앞에선 무릎을 꿇는 것처럼, 각자의 사연과 믿음에 기인한 그 다양한 얼굴들은 뜬금없다기보다는 무난한 명분을 갖고서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낸다.

소설 속에서 사용하는 초능력도 기대 이상이었다. 파쇄자, 정지자, 복원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언가를 폭파하거나 멈추게 하거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는 능력이라니. 곁들여진 과학적 설명이 잘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아무렴. 초능력에 걸맞은 액션 장면들을 멋있게 잘 그려낸 것 같았다. 소설 속 공간 배경이 유령도시에 한정되어 있다는 게 좀 아쉬울 정도. 바깥세상으로 나와 보다 현실적인 부분과 결합한다면 훨씬 더 재기발랄한 장면들이 그려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원과 경선산성의 구도도 좋았다. 함께 손을 잡고 지옥에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두 집단. 상대를 갉아 먹으며 만들어 낸 새로운 싱크홀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결국 또 한 번, 서로의 연대였다. 윤서리와 정여준이 새롭게 쌓아 올린 나선 계단을 밟고 올라온 소설 속 모두가 따뜻한 볕이 드는 바깥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사실 왓챠에서 봤다는 한 줄 평은 로맨스에 대한 것이었다. 소설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로맨스가 약하다는 평이 많고 실제로도 그렇다. 나 역시 읽는 내내 정여준와 윤서리의 서로를 향한 맹목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가 싶었으니까. 그런데도 정여준의 마지막 대사에는 마음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사랑한다는 표현 하나 없이 이 정도로 설레게 하는 것도 재주다 싶고. 아무튼 간만에 장르 소설 하나 잘 읽은 느낌.